글쓴이 : SOONDORI
과거를 경험하지 못했으니 과거를 알려면 과거의 작은 절편을 찾고 그것을 하나씩 붙여가며 재구성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하는 통신분야 강자 Maxon과 동원전자 Inkel, ‘아로나민’으로 유명한 일동제약 그리고 초창기 ElectroVoice, Scott와의 거래 등이 언급되는 어떤 간이 논문의 일부.
* 원문 : 사례 연구-맥슨전자 케이스-서울대학교 부교수 조동성?(작성 일자 N/A, 출처 : https://s-space.snu.ac.kr)
“…맥슨전자 설립의 추역이었으며, 기술과 수출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윤두영 이사는… (중략)
통신기기 전문 업체로서의 성장
1974년 5월 윤두영 이사는 전문 전자제품의 생산을 위해 500평 남짓한 공장을 짓고 자본금 5,000만원, 직원 200명으로 맥슨전자를 설립하였다. 순수 국내자본과 기술진으로 구성된 맥슨전자는 이듬해인 75년 자체 개발ㆍ생산한 엠프를 전량 미국 스코트(scott)사에 수출하는 실적을 올렸다.
당초 윤 이사는 무전기 전문 생산업체로 맥슨전자를 설립하였으나, 창립 초기에는 무전기의 수요나 맥슨전자의 기술이 부족하여 무전기보다는 앰프가 생산의 주종을 이루었다. (註, 단파라디오를 쓰는 사람을 단속하던 시절이었으니 생활무전기는…)
그러나 1976년 2월 청주 공장을 준공하면서 본격적인 민수용 무전기의 생산ㆍ수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그해 12월에는 한국기업 중 최초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F.C.C.)로 부터 민수용 무전기의 형식승인을 받아 미국 수출의 활로가 트였다.
이무렵 민수용 무전기에 대한 미국 내의 수요가 증대되어, 75년 5억 6,900만원(120만$)이었던 수출액은 76년 17억 6,900만원(350만S), 77년 22억 2,400만원(465만 $), 78년 49억 6,900만원(1,023만$), 79년 64억 5,200만원(1,300만$)로 급격히 늘어남으로 5년만에 10배가 넘는 신장세를 보였다.
이후 80년도에는 민수용 무전기의 붐이 사라지면서 맥슨전자의 수출액이 72억 1,900만원(1,162만$)에 머물렀으나 윤두영 이사를 주축으로 한 기술진에서 이미 무선전화기, 산업용 무전기의 개발을 완료하여, 생산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81년 8월에 생산을 시작한 무선전화기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게되자 맥슨전자의 수출액은 81년 189억 1,900만원(2,756만$), 82년 246억 9,100만원(3,487만$), 83년 485억 600만 원(6,127만$)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여 수출 유공 철탑산업훈장과 5,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맞추어 맥슨전자에서는 지속적인 신제품 개발을 위해 83년에 국내 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최신 기계설비를 갖춘 청주 제 2공장을 준공ㆍ가동함으로써 통신기기전문업체로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다졌다.
매출액의 감소와 재도약의 모색
1983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는 미 국내의 무선전화기 주파수 규격을 27~49MHz에서 46~49MHz로 변경한다고 발표하였다. 주파수 규격의 갑작스런 변경으로 말미암아 미국 내의 수입ㆍ판매업자들은 종전의 규격으로 생산된 제품의 재고를 신속히 처분하기 위하여 84년의 신규 수입오더를 급격히 줄여 버렸다. 그 여파로 인해 83년에 무선전화기를 주종상품으로 하였던 맥슨전자의 수출액은 84년 한해동안 322억 3,900만원(4,020만$)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에 맥슨전자에서는 특정 제품의 급격한 수요감퇴에 따른 매출감소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의 기술연구소를 확충하는 한편, 84년 Maxon Systems Inc.를 미국 현지 법인으로 설립하여 신기술과 제품의 개발 능력에 박차를 가하여 재도약을 위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최고 경영층의 역할분담
맥슨전자는 일동제약 윤용구 회장의 두 아들인 윤두영 이사와 윤원영 대표이사에 의해 창립되어 경영되어 왔으므로 일동제약이 맥슨전자의 모기업이라 할 수 있다. 맥슨전자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한 장남 윤두영 이사는 경기 중ㆍ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새크라멘토 대학과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후, 미국의 군사 로키트 관계 전자회사와 제록스 데이터 시스템 사에서 근무하면서 엔지니어의 실무경력도 쌓은 바 있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경영자이다.
민수용 전자제품 기술과 시장여건 등을 공부하여 전자회사 설립을 구상했던 윤이사는 1970년에 귀국하여, 미국의 Electro Voice사와 합작으로 오디오 전문회사인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사를 설립했으나, 국내 실정에 어두워 매출 실적이 부진하자 희사를 매각하고 1974년 동생인 윤원영 대표이사와 함께 맥슨전자를 설립하였다.
맥슨전자의 창립에 관해 윤원영 대표이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형님(윤두영 이사)께서는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사의 매각 후에, 가전제품 생산이 중소규모기업으로서는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전문 전자제품인 무전기 사업에 승부를 걸기로 작정하고 맥슨전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무전기에 대한 수요가 적어, 설립 당시부터 수출에 주력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외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면 상호부터 외국인 취향에 어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Maximum + On올 줄여 Maxon이라는 이름올 만들었습니다. ”
맥슨전자의 창립시부터 재직하여 왔던 모 부장은 최고 경영충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비록 미국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표이사의 직위에는 오르실 수 없지만, 회사 내에서는 윤두영 이사님을 사장으로 부르고 있읍니 다. 그분이 기술개발과 수출을 담당하여 일을 벌이고 추진하는 스타일이라면, 일동제약의 부회장올 겸직하고 계시는 윤원형 대표 이사님은 관리를 담당하여 뒤에서 챙겨주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맥슨전자는 이와 같이 형제 경영인의 협력과 경영 스타일의 조화가 어울어진 2인 경영체제를 창립 당시부터 유지하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맥슨전자가 급성장 하게 된 것은 윤두영 사장님의 해박한 이론 및 실무 지식, 신제품ㆍ신기술 개발에 대한 집념이 윤원영 대표 이사님의 관리 능력과 조화를 이루어 안정적이고도 강력한 경영체제를 구축한 데 힘입은 바 크다고 보아야지요. (중략) 현재 최대의 고객으로 정착된 다이내스칸사와의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3년간이나 끈질기게 그 회사의 경영진을 설득하였다는 일화에서 보여주듯이…”?(기타 생략)
이상을, 가난했던 나라의 어떤 특수한 시절에 특별한 교육을 받고 특별한 미국 경력을 쌓고 특별한 가족 지원을 받았던 분이 대한민국 전자산업에 특별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결과론으로서) 일본 의약계와 연결된 어떤 재벌가의 긍정적 활동 사례로 이해를 하고…
(▲ 1990년 11월 광고. 동아일보 아카이브. 표제부 사진의 좌측은 해외의 MX-3000, 우측은 해외의 CM-70)
[ 관련 글 ]
맥슨 시스템즈 WX-1 날씨 예보 라디오, Made In Korea
자동차 오디오 세상 : GE Model 3-5808A 자동차용 생활무전기, Made In Korea
그나저나 빈티지 오디오 세상과의 결합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리되는 것인지? 재정렬 종합을 해보면,
○ 1970년~1975년 : 윤두영 대표의 기초 활동
– 1972년 : Electro Voice사와 합작으로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社를 설립.
– 1974년 : 사업 부실로 IKE를 매각하고 맥슨전자 설립.
– 1975년 : 자체 개발ㆍ생산한 엠프를 미국 스코트(scott)사에 수출. (회사 매각 직후 오디오를 수출한 것은 이미 진행된 일이라 해당 인수 계약서에서 양해가 되었을 것으로 간주)
* 관련 글 : SCOTT와 A 시리즈 인티앰프와 인켈과 필소닉, Made in Korea
○ 회사 매각의 이면 스토리는 고 조동식 회장에게 인수를 제안하셨다는 마샬전자음향 박병윤 선생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다. 여기서, 미국 Electrovoice가 主, 윤두영 대표의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는 언급되지 않는다.
“(고 조동식 회장) 박 사장, 나 술장사해서 돈 좀 많이 벌었어,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장사해서 돈 많이 벌었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죽으면 술 팔아서 돈 벌었다는, 거… 그리 과히 좋지 않은 명예에서 탈피하고 싶은데… 정부에서는 돈 벌었으면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라고 하는데, 난 전자공업을 좀 해보고 싶어”
“(박병윤 선생님, 과거 고려전자 대표) 지금 한국에 투자했던 회사 몇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려고 해요. 그 회사 중에 하나, 엘렉트로보이스(ElectroVoice)라는 회사가 있는데…”
* 관련 글 : [오디오의 역사를 만나다] 고려전자 마샬, 박병윤 (2)
○ 1976년 : 조동식 회장이 사명을 동원전자로 변경. 직전의 필소닉(Philsonic) 브랜드는 폐기. (예: Philsonic TK-600 튜너, R-316 리시버 등이 있음) 윤두영 대표가 작명했던 회사 이름의 축약어, Inkel을 브랜드명으로 사용. “잘하셨습니다. 스트라우트처럼 독일 냄새가 납니다”
○ 1980년 : 미국 Sherwood(1953년 설립) 인수. 이후 이런저런 복잡다단한 행보. 한때 삼성전자 1/10 수준의 국내 매출 포함. (한때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부품을 보고 많이 투덜거리기도 했던 대한민국의 인켈은… 참 잘 나갔다. 오디어 세상을 알아가면서 보니 여전히 좋은 기기가 많고)
* 관련 글 : 인켈이 만든 Sherwood 오디오들 (1)
이상의 이력에 있어서,
1) 대한민국 오디오사의 핵심 키워드 Inkel은 회사명 INternational Korea ELectronics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2) 동원전자/인켈 설립 시점을 1970년으로 표기하는 배경이 따로 있다는 점은 강조를 해야겠다.
이하, 세 가지 항목에 대한 상상과 탐색.
○ 윤두영 대표의 IKE가 미국 Scott에 수출했다는 모델은? 이 경우 동원전자 인켈과의 업무 중복성은 없는 것으로 본다.
‘1970… 1972년’ AND ‘Made in Korea’로 찾으면 된다. 그것은 나중에. 일감 아래 트랜지스터식 235S 인티앰프(1970~1973)와 엇비슷한 모습이거나 엇비슷한 등급일 것이라고 상상을 해보았고…
(출처 및 정보 열람 : https://www.audioservicemanuals.com/s/scott/scott-235s/70238-scott-235s-owners-manual)
오해가 없도록… 아래와 같은, 디자인 유니크한 스코트 오디오는 1970년대 후반기의 동원전자 인켈이 생산한 것이다. 시점상 맥슨과는 관계가 없음.
(▲ R-337 리시버)
○ 앞선 간이 논문에서 언급된 <미국 계측기 전문기업 다이나스캔(Dynascan)과의 거래>는 유명한 코브라(Cobra) 브랜드 CB의 위탁 제조에 관련된 것이었을 것. 그런데 한편으로, 다이나스캔의 자회사로 오디오 유통 부문을 담당했던 미국 로이드社가 아래 Made in Korea 기기를 취급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아랫글을 쓰면서 누굴까? 많이 갸우뚱거렸는데, 이쯤에서 “약간 어설픈 로이드 H-415 리시버는 사업자간 협약의 연결 고리를 가진 동원전자가 제조하였다”로 잠정 정리해둔다.
* 관련 글 : Lloyd’s H-415 리시버, Made In Korea
○ 1995년에 59세였던, 2011년, 75세로 고인이 되신 윤두영 대표는 어떤 분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공개된 사진은 없음.
1) 맥슨전자 어떤 회사 (매일경제, 1999.09.21, https://www.mk.co.kr/news/home/view/1999/09/81779/)
국내기술로 무선전화기 1호(81년 8월)를 개발해 해외시장에 내보냈으며 국내에도 처음 선보였다. 내수시장보다도 해외를 주무대로 사업을 일군 맥슨은 당시 무선전화기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88년에는 태국과 필리핀에 공장을 만들어 생산기지를 만들 정도로 사세를 키웠다.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정·관계의 필리핀 방문시 반드시 들를 정도로 명성이 높았으며 현지 정부도 그 만큼 예우를 해주는 사업장이었다.
2)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27> (2011.08.03, 출처 : https://iton.tistory.com/1054)
퀄컴은 전자교환기 기술이 부족했다. 설계능력은 우수했지만 대량생산이나 제조기술이 취약했다. 미 퀄컴사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기업 인수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박헌서 회장의 계속된 회고.
“퀄컴 제이곱스 사장을 만났더니 한국의 맥슨전자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귀국해 맥슨전자 윤두영 회장(현 미국거주)을 만나 퀄컴측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퀄컴에서 ‘인수의사를 가지고 있던데 혹시 의향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 회장이 그냥 씩 웃고 넘기시더군요. ”
윤 회장는 일동제약 창업주인 고 윤용구회장의 장남이다. 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72년 인켈의 전신인 인터내셔날 일렉트로닉스를 설립했다. 이후 이 회사를 동원전자에 넘긴 후 74년 맥슨전자를 설립했다. (중략)?
체신부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의 증언.
“ 만약 국내 기업이 단독으로 퀄컴에서 기술을 이전받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CDMA개발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미국이 CDMA기술을 표준으로 결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 기업이 특허권을 가진 기술이고 퀄컴이 로비를 벌여 미국표준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중략)?
“퀄컴이 처음 시작할 때는 벤처기업이었겠지만 CDMA기술을 개발했을 당시는 인원이 700-800명에 달했습니다. 퀄컴 경영진인 어원 제이콥스와 앤드류 버터비는 80년대까지 통신공학의 최고봉이었습니다. 퀄컴사는 미국에서 위성통신시스템을 이용해 차량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옴니트랙스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가입자가 많았습니다. 그 사업에서 수익을 내고 있었어요. ”
ETRI 이영규 본부장(TTA전문위원 역임)의 말.
“역사는 결과론 입니다. CDMA개발이 성공하니까 호사가들이 퀄컴인수 등의 말을 하는 것이지 당시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CDMA성공여부조차 불투명했습니다.”
맥슨전자는 인수하겠다고 하고 삼성전자에게는 인수해달라고 문을 두드린 Qualcomm. 그렇듯 상반된 태도는 경영 여건의 변화 때문이었겠으나…
삼성전자가 퀠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면 하드웨어 만드는 품의 1/10만으로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었을 터. 한때 당시 임원들의 ‘생각 없음’을 힐난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제안’이었다는 ETRI 이영규 본부장의 말씀을 보면 뭐… 그럴 수도. 그렇지만 어찌 해도 Risk Taking을 안 한 것은 팩트. 제조자로서 유형물 중심의 관성적 사고를 한 탓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