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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사를 앞서 나간 천우사, 기억하지 못하는 국산 브랜드

글쓴이 : SOONDORI

‘하늘 친구’라는 천우(天友).

1947년에 설립되어 필립스 한국총판을 담당했던 무역회사(대표자 전택보)가 시장의 성장 트렌드를 읽고 욕심을 내서, 절반 짜리 전자 회사로서, 논리상 절반쯤 국산화된 제품을 만들었다. 그 천우사는… 엇비슷한 발음에, 태광산업 Eroica의 전신이라서 흔히 기억하는 ‘천일사’와 무관했던 태동기의 국산 브랜드.

(▲ 함경남도 출생, 1901년~1980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726)

(표제부 사진 포함 출처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7012400329202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01-24&officeId=00032&pageNo=2&printNo=3499&publishType=00020)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최초 라디오인 금성사 A-501(1959년 소개)도 100프로짜리 국산품은 아닐 터이니… 1950년대, 그 시절을 기준으로 국내 조립품과 국산 제품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관점에 따라서는 금성사 이전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던 회사로 봐도 무방하다.

(내용 추가) 삼양전기의 라디오도 금성사 A501보다 먼저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최초’를 판단하는 기준은 서울-부산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데 입석이나 좌석이냐 정도의 차이일 뿐? 삼양전기, 태양전기, 아이디알공업, 천우사는 겨우겨우 입석이었다는?

[ 관련 글 ]
삼양전기의 라디오들
금성사 A-501 라디오, 역할의 대물림

천천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래 논문에는,

* 열람 문서 : 냉전기 한국 라디오 수신기의 생산과 보급-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장영민-2019년
(출처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21629)

직원 40여 명으로 태동기의 타 회사 또는 타 상점에 비해 월등한 개발 및 생산 체제를 유지했다는 언급, (선전 매체로서의 라디오의 기능에 주목한 미국의 판단하에) 국제연합 한국경제조정관실(OEC, Office of Economic Coordinator) 원조 자금을 활용하면서 필립스 진공관 라디오를 양산하는 도중의 이런저런 에피소드, 미국/UN 정책 자금을 받은 마당이라 소비자 가격까지 통제받았다는 사실 등 초창기 천우사 활동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어찌 보면 천우사 활동 보고서에 준하는…

다음은 흥미를 유발했던 앞쪽의 몇 단락.

“…그렇지만 수신기 생산에 관한 체계적이며 충실한 연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금성사가 최초로 국산 라디오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인용하거나 라디오 상점과 수리기술자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저술이 대부분이다. 금성사의 사사는(금성사, 1985; LG, 1997) 자사 위주로 자세하게 서술되었으나, 금성사 외에도 당시 업계의 경영, 생산과 판매, 제품 자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의외로 신문기사에서도 가치 있는 자료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상세하지도 않은 짧은 글이라도, 수신기 생산과 기업에 관련된 현황을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본고가 이용한 대부분 자료는 미국 정부기관, 특히 주한 미국공보원과 원조기관이 작성한 문서이다. 한국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으므로 대단히 긴요하다. 특정한 자료의 편중이 초래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정부 문서를 비롯한 한국 자료를 충분히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연구의 한계이다. 천우사가 한국 최초로 라디오 수신기를 대량생산하여 판매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천우사의 수신기 생산에 관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는 것은 연구의 허점이다…”

“…1956년 4월 미국공보처(USIA)는 주한 미국공보원의 요청에 따라서 오랫동안 공석이던 방송 담당관으로 존 커티스(John Curtis)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1년이 넘는 재임 기간에 라디오는 물론 갓 출범한 텔레비전 방송을 대한 선전에 이용하려고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관심 중 한 가지는 수신기 보급 실태였으나, 한국정부나 KBS가 제대로 조사한 바가 없었으므로 신뢰할 만한 통계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각종 자료를 통해서 보급 대수를 5만 대에서 25만 대 사이로 대충 어림잡았다. 그중에서 미군 심리전 부대가 추산하는 163,000대가 가장 정확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커티스는 향후 수신기 보급률은 의심할 것도 없이 가파르게 상승하리라고 전망하였다. 비록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을지라도, 한국정부의 외제 라디오 수신기의 수입 노력, 미군 PX와 밀수 등 불법적인 보급 통로의 존재, 텔레비전 방송의 개시 등 전문가로서 방송이 대중매체로 정착해 나가는 현상을 목격하고 판단한 결과였다…”

“…당시 서울 충무로에 소재한 라디오 판매점 기쁜소리사는 “라디오 문화의 최고봉”이라고 자칭할 만큼, 미국 제니스, 독일 뢰베-옵타, 영국 부쉬 총대리점으로 각종 외제 수신기를 판매하던 대표적인 상점이었다. 그러다가 서독 수입 및 미군 PX 등에서 구입한 라디오 300여 대를 수입관세 포탈 및 밀수 혐의로 압수당하였고, 부사장이 장물취득혐의로 구속되었다(기쁜소리사 수사(1959.7.3). 「동아일보」, 3;광고(1959.7.4). 「동아일보」, 3;기쁜소리사부사장 장물취득 혐의구속(1959.7.22). 「동아일보」, 3). 또한 50년대 말 신문에는 미군 부대나 PX에서 라디오를 절도한 사건 기사가 자주 게재되었고, 암시장에 관련된 미군 문서도 라디오를 흔히 언급하였다. 그러나 압수당한 한국 상인이 미군에게 사거나 선물을 받았다고 하며 빈번히 항의하던 일에서 보듯이, 모든 거래를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라디오 수신기를 공장시설에서 가장 먼저 제작하여 판매하였던 회사는 천우사였다. 천우사는 전택보가 1947년 3월 설립하여 홍콩 등 동남아와 교역하던 무역회사였다.52 주로 농산물을 수입하던 천우사는 정전 후 대성목재와 조선피혁을 인수하며 제조업으로도 진출하였다. 또한 1955년 약 15,000달러에 달하는 산업용 형광등 수입을 OEC로부터 허가받았다.53 1956년 5월에는 필립스 한국총대리점의 명의로 중단파겸용 전지식 4구 필립스 제품 라디오 수신기를 23,000원에 판매한다는 신문 광고를 냈다. 무역업자인 전택보는 한국을 비롯한 저개발 신생국가에서 라디오가 대중매체가 되어가고 텔레비전 방송까지 나온 상황을 지켜보고 새로운 유망사업으로 전자제품 수입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천우사는 라디오 외에도 확성기, 스피커, 콘덴서, 진공관, 전축, 마이크, 기타 통신기 완제품과 부속품 등 전기전자제품을 판매하였다. 1958년에는 필립스 한국총대리점을 유지하면서 일반무역대행까지 하였고, 도쿄와 마닐라에 해외지점을 두었다…”

“…1957년 천우사는 부품을 전량 수입하여 필립스의 모델 u134 AC/DC 수신기 약 2,000대를 조립하였다. 미국 원조기관은 교류로 작동되는 이 수신기는 종전보다는 상당한 정도로 판매되고 있으나, 대량보급을 하기는 여전히 높은 가격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천우사는 매달 1,000대를 판매하기 바랐고, 향후 국내 제작된 부품을 더욱 많이 사용하고자 하였다. 1958년 2월 천우사는 필립스의 지원을 받아 도매가 12,000~15,000환짜리 라디오 세트를 조립생산하고 있었다. 1958년 11월 판매되던 천우사의 또 다른 수신기의 도매가가 22,000환이었다는 것을 보면, 이 초기제품은 성능이나 사양이 낮았다고 추측된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1957년 하반기에 천우사가 라디오 수신기를 제작 판매하였고, 비록 저품질의 조립품에 불과하였을지라도, 수신기가 한국 최초로 대량생산되었다는 사실이다. 라디오 등 전자제품의 판매점과 수리점이 불과 몇 명의 직원을 두었던 것과는 다르게, 천우사는 판매원 5명과 기술자 37명을 고용하였으므로, 생산시설은 연간 수 천대를 제작하던 공장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코카드 상사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수입업자, 도매상, 소매상으로 한동안 선두를 달렸고, 라디오 수신기를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천우사가 주도권을 잡았으므로 포기하였다…”

(▲ Philips u134. 필립스가 단물이 쪽~ 빠진 1942년의 구닥다리 설계도를 건네주었다는 것인가? 출처 및 추가 정보 열람 : http://www.radiopeter.se/gotoradiopeter/peterslist.html)

천우사의 본격적인 전자사업 시작점인 1957년 이후로 거치형 진공관 라디오는 물론 TV, 전축, 휴대형 라디오 등을 만들며 재벌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1983년 부도로 사라졌다.


○ 대단한 소장 가치를 생각하면… 천우사의 태동기 라디오를 갖고 계신 분이 계실까? 아무튼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천우사 활동의 피크 기간.

천우사 라디오 카세트 스페인에 첫 수출 (매일경제, 1974.06.11, https://www.mk.co.kr/news/economy/252654)

천우사는 주력 상품인 AM, FM 라디오 카세트 레코드(CT8000)의 개발을 완료, 량산 체제를 갖추고 지난 8일 「스페인」의 임펙스사에 1천 대(4만 7천 달러)를 첫 수출했다. 11일 전자업계에 의하면 천우사는 지난 2년간에 걸쳐 국내 기술진만으로 대당 47달러(FOB)의 고급 카세트 라디오 제품을 개발, 이 단일 제품만으로 년간 7백만 달러의 수출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수출을 개시했다. 동사는 이번에 처녀 수출한「스페인」지역 외에도「이탈리아」의 트리덴트로부터도 2천 5백대분의 L/C를 받아놓고 있는 것을 비롯 미국, 영국, 서독 등에도 광범위한 판매망을 확장할 계획이다.

○ 다음은 Chunu 이름으로 수출되었던 CT-8000 포터블 카세트. 소재지는 이탈리아. 후면에 ‘Made in South Korea’라고 적혀 있다.

(이상 출처 : https://catania.bakeca.it/dettaglio/antiquariato-collezionismo/radio-cassette-ampquotchunuampquot-ct8000-yjmt252575992)

천우사, 천일사, 천향전기공업사… 전쟁의 와중에 스타(Star)를 각인하고 대대로 하늘 천(天)을 좋아했던 당시의 작명 트렌드일 것이다.

1940년~1970년대, 가난했던 나라에서 하이파이가 유행하기 전의 시장 현황, 제품, 국가 정책 등에 대해서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인지? 그런 것은 영~ 재미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누군가 기록하고 종종 반추해주지 않으면 소중한 태동기의 과거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각종 논문이나 보고서, 국가 운영 DB 등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료가 있음. 역시… 한쪽 구석에서 역사와 문화를 지키려는 분들이 계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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