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DATABASE > Sumida 코일… 거 정말 못쓰겄네!

Sumida 코일… 거 정말 못쓰겄네!

글쓴이 : SOONDORI

캔우트 튜너, 야마하 튜너 그리고 삼성전자 S36T 튜너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수미다의 이런저런 코일 제품이 있다. 그들이, 마산수출자유지역 공장에서 각종 특혜를 받고 일제 전자제품용 코일을 생산. 그것이 Made in Korea 제품, Made in Japan 등 제품에 들어갔고…

그러다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기.

○ 한국수미다전기의 집단 해고 통보

“… 한국수미다전기는 통신과 전자기기용 코일을 주로 생산하는 회사로 본사는 일본 동경에 있었고, 사장은 쿠시노고이찌(八幡一郞)로 자본금은 약 30억 원에 이르고 있었다. 1972년 자본금 1억 2,000만 원을 전액 출자해 마산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설립했다. 한국수미다전기는 처음에는 50명으로 출발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수미다전기 해외생산의 주력공장으로 성장해 1980년대 초에 종업원이 3,000명을 넘고 있었다. 약 16년 동안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4시간 잔업과 월 2회의 휴일 근무조차 무급으로 일했다. 이렇게 수익을 벌어들인 수미다전기 일본 본사는 1970년 4억 8,000만 원이던 자본금이 1987년에는 50억으로 10배 이상 크게 성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전국적인 노조 결성 흐름 속에서 한국수미다전기에도 8월 11일 노동조합이 결성돼 임금, 권리, 작업환경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1988년에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크게 향상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회사측은 단체협약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노동조건이 더 열악한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수미다전기를 폐쇄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원가와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임금을 분할지급하는 등 폐업을 위한 사전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노동조합 설립 당시 2,000명이던 노동자들을 희망퇴사자 형식으로 1년 만에 700명으로, 2년 후인 1989년 6월에는 500명으로 감원했다. 이어 생산기재를 중국과 말레이시아로 반출하고 있었다.

1989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3시경 일본에서 팩시밀리 한 장이 도착했고, 조합원들은 이 사실을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야 알게 됐다. 이 팩스 한 장으로 450명의 한국수미다전기 노동자들이 일시에 해고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현장에서 생산을 계속했지만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주문이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회사측의 생산자재 밀반출을 방지하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 부당해고 철회를…” (1989년 11월 15일, 노동자역사 한내, https://www.hannae.org/old/index46be.html?c=user&mcd=hnl0001&me=bbs_detail&idx=33596&cur_page=9&sParam=)

○ 노동집약적 산업에 예고되었던 쇠락

“… 마산공단의 아침은 출근하는 여공들의 발걸음소리와 더불어 밝아온다. 경남 마산시 양덕동에 위치한 수출자유지역의 후문.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7시부터 근로자들이 한두명씩 띄엄띄엄 들어오기 시작해 7시40분쯤 되면 상당수로 불어난다. 8시부터 10분간은 피크를 이루어 6등분된 철문을 꽉 채우며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온다. 거의 젊은 여자들이지만 가끔 40대 아주머니들도 눈에 띄며 표정들은 대체로 밝다.

문앞에서 한 소녀가 국가보안법 철폐와 구속양심수 석방에 관한 文東煥목사의 강연을 알리는 전단을 나누어 주는데, 받자마자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또 안받으려고 애써 피해가는 사람에, 받아서 열심히 읽는 사람도 간혹 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발걸음들이 빨라지고 택시에서 헐레벌떡 내려 숫제 단거리 선수처럼 문을 주파해 뛰어들어가는 여성들도 몇 명 보인다. 8시25분경이면 출근하는 발걸음이 거의 끊긴다. 얼핏보면 마산공단의 아침 출근광경은 여느 공단이나 마찬가지로 활기차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외부인의 피상적인 관찰일 뿐,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큰 병을 앓고 있다.

이곳에 입주한 70개 업체의 종업원수는 2만 6천여명으로 80%정도가 여성근로자인데 1년전에 비해 7천여명이 줄었다. 입주업체의 폐업, 철수 또는 감원으로 종업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70년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 수출진흥과 고용증대 그리고 기술향상을 통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케 한다는 목적에서 설치된 이곳 수출자유지역은 여러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요소 또한 애초부터 안은 채 출발된 것이었다. 하지만 가령 78~88년의 10년을 비교해보면 수출은 3.6배, 투자는 1.8배가 늘어나는 등 고도성장을 계속해왔다. 수출액 중 외화가득률이 50%가 넘었고, 특히 1천4백억여원이 임금으로 지불되어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바도 컸다.

그런데 이곳이 위기에 처해 있다. 89년에 이곳에서 문을 닫거나 철수한 업체는 5개나 된다. 87년에 입주업체 하나가 줄고 88년에는 변함이 없었던 데 비한다면 89년의 이러한 현상은 큰 변화이다. 기계가공업체인 극동화스너와 신발제조업체인 한국판창은 경영부실로 도산했다. 전자회사인 한국TC는 노사분규와 경영난 때문에, 형광표시관 제조업체인 한국이세는 시험가동 중 폐업했다. 스포츠 자전거 제조업체인 코렉스는 창원공단으로 이주했다. 이밖에 지난 10월 폐업통지를 해온 한국수미다전기의 경우도 폐업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 사실상 문을 닫고 있는 상태이다. 이로 인해 “89년 수출실적은 88년 수준에 훨씬 못미치는 17억5천달러정도가 예상된다”고 趙光國 마산수출자유지역관리소장은 전망한다.

몇년전만해도 업체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그런데 지금은 폐업 · 철수한 업체가 잇따르는데도 입주희망업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단부지 중 5.6%인 1만3천6백평이 빈땅으로 놀고 있다. 더욱이 남아 있는 외국투자업체들도 서서히 발을 뺄 채비를… (1990년 1월 7일, 시시저널,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699#google_vignette)

노동권 보호 수준이 너무나 거지 같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였다고 하지만, 서류 한 장으로 집단 해고하는 것은… 그동안 단물 빨던 일본인이 대한민국 노동자 집단과 사회 체제를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함. 수미다만 그랬을까? 마산, 창원, 가리봉 등 모든 지역에서, 너무 흔했던 일.

재수 없음?

글쎄요… 오늘의 SPC가 내 딸처럼 어리거나 늙은 노동자를 마구 돌리는 것과 크게 다를까? ‘땅’에다 돈을 박고 ‘노동’은 우습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런 나라이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를 지게차에 랩으로 묶고, 몹시 낄낄거리던 회사의 사장놈과 직원놈들은, 그 회사가 망해야 정신을 차릴까? 힘들게 버텼던 시절을 잊고 스스로 Sumida와 같은 가해자가 되었다는 게 참으로…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qns0QpNC8c)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