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SOONDORI
* 2010년 방송통신위원회/한국전파진흥원의 ‘AM 라디오 및 표준 FM 라디오 방송주파수 이용 개선방안(방송통신위원회 정책 2010-02)’ 연구문서의 내용 중 과거 우리나라 방송 태동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들이 있어 몇 편으로 나누어 복사 게시합니다. 해당 연구논문 PDF 파일은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은 첫 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이때 라디오 출력은 1Kw, 주파수 파장은 435m(약 690㎑), 호출부호는 JODK였다. 호출부호JODK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경성방송국은 대한민국의 방송국이아니라 일본 본토에 설립된 3개의 방송국의 뒤를 이은 일본의 4번째 방송국으로 설립되었다. 방송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였으며 내용은 기상, 시보, 증권거래소의 상장 거래가, 시사, 강연, 음악, 기타 오락 프로그램들이었다.
개국 초기의 경성방송국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율을 1 : 3 정도로 구분하여 방송을 진행하였으나 국내의 일간 신문들이 이를 비판한 이후에는 2 : 3으로 수정되었다. 경성방송국은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있어 그동안 접해보지못한 신매체로서 각광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한 채널에서 언어를 교체해가면서 방송이 된다는 점이 매우 큰 단점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값비싼 수신기의 가격과 일본에 비해 2배였던 한 달 청취료는 청취자를 늘리는데 있어 큰 장애가 되는 요소였다.
한편, 수신료를 통한 수익으로 운영되던 경성방송국의 경영이 점차 어려워지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분리하여 방송하는 이중방송 및 전국에 지방방송망을 구축하는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1933년 4월 26일, 경성방송국은 출력을 10Kw로 증설하고 일본어 방송을 ‘제1방송’, 한국어 방송을 ‘제2방송’으로 명명한 이중방송을 시작한다. 이 당시 제2방송의 주파수는 610㎑이었다. 비록, 뉴스는 통신사에서 가져오는 일본어방송을 직역해서 우리말로 번역 후 방송하기는 했지만, 제2방송이 시작되면서 한국인 방송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 표제부 사진은 경성방송국에서 사용했던 마이크, 출처 : http://m.museum.seoul.kr
경성방송국은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성공적인 이행을 위해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홍보매체로 활용되는 등 본래적인 매체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2) 그러나 전쟁을 통한 청취자 확보는 경성방송국이 오히려 자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라디오 청취자가 급격하게 중가하기 되는데, 뉴스매체로서 라디오의 효용성을 일반인들이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만주사변 직후에 국내에서 라디오를 청취하는 사 람이 1만 명을 돌파하게 되지만 이 중 조선인은 1,524명에 불과했다. 3년이 지난 1934년에는 청취자가 3만 명을 돌파하였고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1937년에는 10만 명을 돌파하게 된다.
駐 2) ) 정진석 외 (2008). 한국방송 80년, 그 역사적 조명 , p. 22
* 관련 글 : 우리나라 AM/FM 방송의 역사 #3